이 생각 저 생각 (44) 수주 변영로 5

 

   수주의 명정사십년을 생각하며 쓰기 시작한 글이 다른 이야기로 길어졌다. 내가 갖고 있는 문고판은 김열규 교수의 卞榮魯論이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글로써 이루어진 한바탕 호쾌한 술자리>란 부제의 글이다. 술자리지만 술엔 취하지 않고 웃음에 취하는 자리란 것이다. 어떤 웃음에 취하나? 웃음에도 종류가 있고, 등급이 있다. 눈물과 마찬가지로 웃음에도 거짓이 있는 것이 있으나, 큰 웃음인 홍소(哄笑)에는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다. 가가대소(呵呵大笑) 혹은 앙천대소(仰天大笑)가 그렇다. 가가인지 앙천인지는 몰라도 명정기(酩酊記)는 그런 큰 웃음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천지무구(天眞無垢)하고 거리낌 없는 마음의 자유가 웃음 속에 있다고 했다.

    어떤 글에 대한 소감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김열규 교수는 명정기가 술로 빚은 웃음의 기록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잘못 읽어서 그런지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수주 자신도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불쾌와 회한(悔恨)만 있고, 자괴자탄(自愧自嘆)을 금할 수 없어서 기록을 남긴다고 했다. 지난날의 실태(失態)에 대한 반성문인 것이다. 반성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참회록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른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그리 저질렀을까? 술을 마신 것이 잘못인 것이다. 어떻게 술을 마시게 됐나?

    수주는 자신이 어떤 술의 별[酒星] 밑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취신(醉神)이 햇빛을 보게 된 것[사람으로 둔갑한 것]인지 모른다고 했다. 서양이라면 바커스(Bacchus)의 아들이다. 아주 위는 모르나 선친은 밤낮의 구별이 없이 술을 사랑하시던 분이었다. 백씨[영만]는 모르나 내가 아는 중씨[영태]는 술을 잘 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형들에게 갈 아버지의 술 유전인자를 독차지한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부단한 수련을 쌓았다. 천재란 1%의 영감에 의한 착상[inspiration]99%의 땀[perspiration]의 결과란 말이 서양에 있다. 타고 난 것이 1%이고 나머지는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수주가 술의 천재라면 아마 30%는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DNA일 것이고, 나머지 70%는 후천적인 수련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수주는 이러한 일화를 적고 있다. 5-6세의 일이다. 술이 먹고 싶었다. 어른에게 청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술을 훔쳐마시기로 작정한 것이다. 도음(盜飮)인 것이다. DNA의 작용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아무튼 술독 앞에 다다랐다. 그러나 술독이 높다. 그래 책상과 궤짝 등을 포개어 놓고 기어오르다가 그만 실족하여 떨어졌다. 얼마나 다쳤는지 아프다고 우는 통에 난리가 났다. 곡절을 안 자당은 등반에 실패한 그 독에서 표주박으로 술을 가득 떠서 주셨다고 했다. 감격해서 마셨을 것이다. 어머니 역시 술에 범연치 않으셨다. 게다가 아버지의 아들사랑이 술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술상만 대하면 막내아들을 불러 앉히고, “얘 영복(榮福: 수주의 아명), 술이란 먹어야 하는 것이고 과한 것만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술을 부어주셨다는 것이다. 어디다 부어주셨다는 이야기는 없다. 시작은 어머니였고, 수련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명정사십년은 수주의 실태기(失態記). Journalistic value에 착안하여 기록을 남겼다고 했다. 그러나 재미가 있다고 해도 제3자의 입장에서 남의 실태를 거론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공자가 사람의 좋지 않은 점으로는 자신을 바로 잡는다[其不善者而改之]”고 하였으니(논어』 「述而), 남의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배울 수는 있다. 여기서는 실태인지 본태(本態)인지 하나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술 먹지 않는 사람은 술의 폐해(弊害)를 모른다. 그러나 술 먹는 사람은 그 폐해를 가슴 쓰리게 느낀다. 가슴뿐 아니라 실은 속이 더 쓰리다. 그래 한번은 그 쓰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단연 금주를 해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는 것이다.

    실천이 어렵다. 결행을 위한 압박으로 은으로 禁酒라고 새긴 패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다. 또 동아일보에 장안의 화제가 된 禁酒斷行論이란 글을 싣기도 하였다. 그러자 친구들 사이에서,

    “금주패는 무슨 놈의 금주패야, 개패이지.”

    “개가 똥을 끊지, 그 자가 술을 끊다니 거짓말이다.”

    “술 먹는 자가 술 먹지 않고 이게 무슨 못난 수작이냐.”

등등의 비난하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아무튼 금주패의 효과인지는 알 수 없어도 6년간 금주를 실천하였다니, 신기하고 신통한 결심이었다.

    마침 그 임시에 수주는 미국에 가게 되었다. 때는 1933년이다. 미국의 금주령시대다. 그것이 처음에는 금주실천에 일조를 하였을 것이나, “만리타향에서 한두 잔을 해우(解憂)한들 어떠냐는 생각으로 그야말로 금주국에서 해금(解禁)을 단행하였다고 고백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셨다 안 마셨다 한 모양이다. 그 후도 한두 차례 금주소동이 있었으나 단기간에 그쳤다. 술은 끊어도 친구는 끊을 수 없다는 핑계가 해금사유이기도 했다.

    술은 왜 마시나? 사람마다 이유가 다를 것이다. 수주는 이유를 불계(不計: 옳고 그름이나 이롭고 해로움을 가려 따지지 않음)하고 술잔만 대하면 자연히 수미(愁眉: 근심에 잠겨 찌푸린 눈썹)가 피어지는까닭이라고 했다. 자연의 조화다. 인위(人爲)로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최명(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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