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각 저 생각 (43) 수주 변영로 4

 

   존재하는 것에는 다 이름이 있다.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름을 붙여 그렇게 부른다. 산에도 이름이 있고, 강에도 이름이 있다. 별에도 이름이 있다. 서울 북쪽의 삼각산,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 새벽에 반짝이는 샛별도 누군지 우리 조상이 지은 이름이다. 샛별에는 금성이란 다른 이름도 있다. 사람에게는 대개 성()과 이름이 있다. 성명(姓名)이다. 성명을 그냥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름을 높여 성함(姓銜) 혹은 함자(銜字)라고 하기도 한다. 전에는 자()를 부르기도 했고, 요새도 호()는 많이 쓰인다. 별명도 있다. 예명(藝名)도 있고, 필명(筆名)도 있다. 사회적 지위나 하는 일에 따른 거기에 해당하는 이름도 있다.

    어떤 사람을 부를 적에 무어라고 부르느냐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가는 큰 일 난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직장에 나간다고 하자. 학교의 선생일 수도 있고, 회사의 과장일 수도 있다. 교장은 그가 김 씨면 김 선생혹은 김 아무개 선생이라 부르고, 사장은 김 과장또는 김 아무개 과장이라고 부를 것이다. 지위가 낮은 다른 직원은 그를 보고 김 과장님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금성은 새벽에도 금성이고, 한낮에도 금성이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아버지지만, 밖에서는 김 선생이고 김 과장이 된다. 관계와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고, 명칭도 변한다.

    수주를 생각하다가 이름 이야기가 나왔다. 수주 뿐 아니라, 사람들은 어떻게 불리는 것을 선호할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지만, 수주는 무엇으로 불리고 알려지는 것을 좋아했을까? 시인, 영문학자, 교수, 대한공론사의 사장인지 이사장인지를 지냈으니 사장 혹은 이사장, 변정상의 아들, 변영태의 동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본인은 무엇으로 불리는 것을 제일 선호했을까? 그의 선호를 안다면, 우리는 그가 선호하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옳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가 작년(1930-2020)에 작고한 서울대학교의 이기문(李基文)교수가 떠올랐다.

내가 고등하교 3학년 때였다. 이 교수는 젊은 강사로 나와 국문법을 가르쳤다. 한 학기 배웠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한번은 제주도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건넨 명함에 <시인 아무개>라고 적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명함에는 이름만 있는 것도 있으나 직업[보통은 직장과 직위]을 밝힌다. 그런데 직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시인>이란 것이 들어가서 생경(生硬)하였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가 나에게도 그럴싸하게 들렸다. 시를 써서 원고료를 받거나 시집을 출판하여 인세를 받아 그것으로 호구(糊口)한다면, 시 쓰는 일이 직업인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시인>이 직업은 아니다. 하는 일과 사람의 혼동이라고 할까? 나도 실은 헷갈린다.

    다시 수주 이야기다. 흔히 수주하면, 시인 혹은 영문학자로 통한다. 하나만 말하라고 할 적에 수주는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제일 좋아했을지 모른다. 아니 나도 한 마디로 그를 부르라면 <시인>이라 하고 싶다. 그렇다고 그의 직업이 시인은 아니었다. <시인 변영로>란 명함도 없었다고 단정한다. 나는 그를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서 이름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이제껏 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를 적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조선의 마음이다.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의 서시(序詩)에 해당한다.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

         굴 속을 엿볼까, 바다 밑을 뒤져 볼까

         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헤쳐 볼까

         아득한 하늘가나 바라다 볼까?

         아,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아 볼까

         조선의 마음은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

   하나로는 아쉽다. 이어 내가 사랑하는 봄 비.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回想 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치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 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최명(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추기 1: 명함에 관하여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화신상회(和信商會)와 화신백화점을 세운 박흥식(朴興植, 1903-1994)씨가 언제인지 사업차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을 만나려 했으나 몇 번 거절을 당했다. 그래 순금으로 명함을 만들어 비서실에 내밀었다. 성공했다고 한다. 무게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른다. 한 냥은 되지 않았을까? 우가키는 일본육군대장으로 1923-27, 1931-36년 두 차례에 걸쳐 9년 동안 조선총독이었다.

추기 2: 이기문 교수의 대표저술은 國語史槪說(1961, 수정증보판; 1972)이다. 속담에 관심이 많아 俗談辭典(1962)을 편찬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한 해(1996)에 여러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歸鄕이란 책을 냈다. 수필도 있고, 학술적인 글도 있다. 私家版으로 나왔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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