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6(금) 끝까지 웃으면서 (494)

 

끝까지 웃으면서

월남 이상재는 한 시대의 걸출이었다. 조려조 이색의 후손인 그는 젊어서 한때 당대의 명사이며 초대 주미 전권 공사를 지낸 박정양의 집에 기숙한 적이 있었다. 월남은 당시의 과거 시험이 문란해진 것을 개탄하면서 박정양의 집에서 서생처럼 지냈다고 한다.

 

하루는 박정양이 급병에 걸려 쓰러져 누웠는데 의원을 부르러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월남에게 의원을 불러오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상재는 덜렁덜렁 의원의 집 대문에 가서 집안에 하인을 부르듯 의원 있나?”라고 한 마디 던지니 안에서 의원의 대답이 있었다. 이상재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하여 박 판서가 병이 났으니 어서 가보게라고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의원은 박 판서가 유명 인사인지라 박 판서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박 판서의 병세를 많이 호전시킨 뒤에 저를 부르러 왔던 젊은이가 누굽니까?”라고 물었다. 박 판서가 왜 묻는가?”되물으니 그 의원이 그 젊은 사람 버르장머리가 아주 없더군요. ‘박 판서가 병이 났으니 어서 가보게라고 한 마디 하고는 그만 사라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박 판서가 뒤에 왜 의원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했소?”라고 월남에게 물었다. 월남이 심부름을 잘 하면 또 시키는 법이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박 판서가 곧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비록 이 집에 기숙하고는 있지만 잔심부름이나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박 판서에게 알려준 셈이다. 이상재는 속으로 낄낄 웃고 있었을 것이다. 끝까지 웃으면서 그는 생을 마쳤다.

 

박정양은 그가 초대 주미 정권 공사로 갈때 이상재를 2등 서기관으로 채용하였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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