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81)이영일

 

 

백년의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청탁을 받고 그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유명인사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들을 골라서 일주일에 한 번씩 쓰고 있었다. 대통령, 국무총리, 학자, 성직자, 장성 그리고 시인, 화가, 소설가, 사회사업가등 저명한 인사들만 골라서 썼다. 그러나 돌연 조선일보가 그 칼럼을 중단 한다기에 하는 수 없이 나의 홈페이지에 그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는데 오늘은 이승만이나 정주영같이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이영일이라는 사람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일제 때 장한몽이라는 소설이 많이 읽혔는데 그 주인공이 이수일과 심순애였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이수일하면 심순애를 생각하고 심순애를 생각하면 이수일을 모습을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영일이라는 이름은 그의 짝 장선용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장선용을 더 잘 안다. 장선용은 이화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훌륭한 성적으로 마치고 내 누님이 총장으로 있던 시절 이대 학무처에서 여러 해 근무하였다. 그의 단점이 하나 있다면 장선용은 키가 작아도 매우 작아서 이영일과 맞선을 봤을 때 장선용은 저렇게 키 큰 남자가 있나 하였다니 짐작이 가지 않는가.

 

이영일은 1934118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 시대의 엘리트였는데 아들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그 아버지의 첫 애가 딸이었다. 큰 희망을 가지고 둘째를 기다렸다. 둘째도 딸이었다. 셋째도 넷째도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도 딸이었다. 최후의 희망을 가슴에 안고 이영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 한번 노력을 했다. 그 부모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노력이었다. ? 아버지의 나이가 53세 나 되었으니까. 그렇게 하여 태어난 갓난아기가 아들이었고 그의 이름이 이영일이었다.

 

그는 월반을 할 만큼 총명하여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불온한 벽보를 붙이다 북조선의 보안요원에게 발각되어 소년 수용소에 끌려갔다. 그 어린 것이 죽지 않을 만큼만 맞았다. ? 죽지는 않았으니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1조가 되어 가마니 7장을 다 짜야 옥수수 한 컵 정도를 받아 먹을 수 있었다. 그런 배고픈 삶을 1년이나 살아야했다. 그는 풀려나서 그 후에 열심히 공부하여 수능시험에 만점을 받아 김일성 메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대학에 갈 실력이 충분하여도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 전문학교 밖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이북의 실정이었다. 그가 갈 수 있었던 학교는 김일성대학이 아니고 평양의학전문학교였다.

 

그런데 뜻밖에 사건이 발생하였다. 1950623일 학생들을 모두 차에 태워 일선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에 자리가 없어 다음 차를 준비 하면 타고 오라고 하면서 그들은 먼저 떠나고 다음 날 모이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는데 누이들이 그 동생을 데리고 도망가서 큰 독 안에 숨겨두고 그는 그 독안에서 두 달을 숨어 있어야만 했다. 그런 아슬아슬한 경험을 하면서 1950년 말할 수 없이 추운 날 이영일의 살 길은 오직 하나 남쪽으로 도망가는 그 길 밖에는 없었다.

 

월남 한 뒤 그는 해병대에 입대하여 홍천에서 근무 하면서 중공군의 남침으로 모두 도망간 빈 집에 들어가 거기 있던 영어사전을 한권 발견하고 가지고 나와 영어공부에 몰두하였다. 그 영어 사전을 한 장씩 찢어서 다 외울 만큼 영어의 도사가 되었다. 군의 도움으로 샌디에고에 있는 미해군 특수학교에서 1년 공부를 하고 돌아와 진해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7년을 복무하였다.

 

제대 후 3년을 공부하여 검정고시 합격했고 서울공과대학에 입학, 제대로 졸업장을 받았고 그 뒤에는 석유공사에 입사하여 호주에 가서 1년 또 연수를 받을 기회를 얻었다. 1966년 그는 반도체 회사 페아차일드의 입사하여 한국 반도체 제작에 일선에 서기도 하였다. 그 뒤에 미국 본사로 전근하였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지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는 한국의 사장이 되어 돌아왔다. 60세에 회사를 그만 두었지만 아직 힘이 있어 인터뷰를 통해 미국에 있는 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을 하다 70에 은퇴하였다,

 

지금은 장미를 키우고, 정원을 가꾸고, 채소재배를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 사이에 그의 영원한 동반자장선용은 멀리 사는 며느리에게 보내 주던 요리 편지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어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 하였다. 뜻밖에도 그 책은 지난 25년간 한국 요리 책으로는 유례없는 베스트셀러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미국에 살면서 한국 요리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다. 그가 펴낸 영문판 A Korean mother’s Cooking Notes는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한국 요리 최고의 레시피로 선정되어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대단한 여자이다.

 

DNA가 이토록 각별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아들 둘을 낳고 아직도 서로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나로 하여금 인생은 아름답다고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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