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72) 이범석

 

 

초강 이범석은 평양 만수대 기슭에서 평고(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때 상급반에 있던 나의 선배였고 월남하여 각기 다른 대학에 다니기는 했지만 사회에 나와서도 그는 여전히 나의 선배였다. 평고 교정에서 그를 처음 만난 인상이 지금도 생생하다. 1941년의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이범석은 대대장이었고 생기기도 잘생겼고 체격도 늠름하여 감히 접근하기도 어려운 형님이었다.

 

그는 일제시대 일본에 가서도 교육을 받았고 돌아와서는 고려대학교에 편입하여 김성수, 현상윤등 이 시대의 어른들에 의하여 교육을 받아 이미 지도자의 자세와 자질을 다 갖춘 몸으로 우리 사회에 진출하였다. 처음에는 대한적십자사에서 활약하다가 뒤에는 외무부로 진출하였고 의전실장 등을 역임한 뒤에 주 인도대사도 지냈으며 뒤에는 국토통일원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외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1983109일 대통령을 모시고 동남아 6개국 순방길에 올라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를 참배했다가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감행된 테러로 일행 17명과 함께 순국하여 그는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통곡할 일이다.

 

그 숙명적인 여행을 떠나기 전날 이범석은 누님 김옥길과 나를 신라호텔 일식점으로 초대하여 저녁을 같이 하였는데 그는 그 순방 여행을 정말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일정을 하루 늦추어 남들보다 늦게 떠난 것이 사실이었다. 왜 그는 그토록 그 여행을 가기 싫어했을까, 뒤늦게야 안 일이지만 일제 때 그의 아버지가 버마에 여행을 갔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곳에 가는 것을 그토록 꺼려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이범석은 192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고 들었다. 무슨 사연으로 평양에 살게 되었고 또 거기에서 학교에 다녔는지 잘 모른다. 그가 태어난 집안도 상당하였지만 그가 그토록 사랑하여 마침내 결혼할 수 있었던 이정숙은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잘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그 신부의 아버지가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던 감리교 목사 이윤영이었다. 이윤영은 정치에도 뜻이 있어 해방이 된 뒤에는 조선민주당에도 관계했고 월남하여서는 제헌국회에 나가 의장에 선출된 이승만의 뜻을 받들어 법에도 없던 개회기도를 한 사람으로 명성이 알려져 있다.

 

내가 아는 이범석은 무슨 일에나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안된다라는 말이 나온 적이 없다. 그는 매사에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다. 인도에 대사로 나가있으면서 다른 나라의 대사관저들은 추종을 불허하는 대단한 관저를 지었고 오늘도 주 인도한국대사는 어떤 강대한 나라의 대사관저보다도 더 훌륭한 대사관저에서 근무하고 있을 것이다.

 

그 부인도 보통 여자는 아니다. 한번은 관저의 피아노 밑에 고양이가 똥을 쌌다. 일하는 사람의 분업이 명확한 인도나라였으므로 관저에 와서 일하는 일꾼들의 책임자에게 그 고양이 똥을 치우라고 안주인이 당부하였다. 하인들의 책임자는 곧 그렇게 하겠다고 여주인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뒤에 피아노 밑을 들여다보니 고양이 똥이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어부인께서 자기 손으로 똥을 치워버렸다. 얼마 뒤에 하인의 책임자가 와서 피아노 밑에 들여다보고 그 똥이 어디 갔습니까라고 물었다. 대사 부인은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내가 치웠어요그 하인 우두머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마침내 이런 집에서 일을 못 합니다한 마디를 남기고 관저를 영영 떠나 버렸다니 그 말을 들은 우리들은 박장대소 하였을 뿐이다.

 

이범석은 한창 일할 나이에 악의에 가득 찬 북의 공작원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 되었지만 이범석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오늘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해 1013일 다른 순직자들과 함께 그가 현충원에 매장 되던 때 거기 세워질 비석의 비문을 써달라고 미망인이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갈라진 내 땅 하나 되고 피차에 등진 이 겨레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 흘리는 그날 위해

밤과 낮 가리지 않고 애쓰다 쓰러진 님이여

단군 전에 두견 울고 기자묘에 궂은비 내리면

임진강 나루터의 강물도 목매어 흐느끼리

아 아 그 어느 날에는 통일의 큰 꿈 이루어져

평양 가는 첫 기차 서울 떠나는 기적소리 울릴 때

님이여! 일어나소서 무덤 헤치고 일어나소서

그 밝은 아침에 일어나소서

 

나는 오늘도 평양 가는 첫 기차 서울 떠나는 기적소리 울릴 때 의롭게 살고 간 그대 반드시 무덤 해치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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