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65) 김연준

 

1945년 해방 후에 우리나라에 대학을 설립하여 오늘은 세계적인 대학을 만든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경희대학교 설립한 조영식이고 또 한 사람은 한양대학교를 세운 김연준이다. 이 둘 중에 내가 잘 아는 인물은 한양대학교를 설립한 김연준이다. 백남 김연준은 일제 때 연희전문 출신이어서 학교의 선배이기도하여 더 가까이 지냈다. 연희와 이화가 합의하여 발족한 협성교회가 해방 뒤에 대학교회라는 이름으로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하여 장안에 명사들이 모여 예배 보는 교회가 되었는데 일주일에 한번 예배 시간에 그 교회 가면 김활란박사를 비롯하여 유명한 인사들을 만나 이화여대 총장 공관처럼 쓰이던 새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함께 하였는데 그 자리에 틀림없이 김연준이 동부인하고 참석하였다. 그때 나는 매우 젊은 사람이었지만 김활란총장과의 친분 때문에 자리를 같이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백남의 첫 인상은 매우 온순한 편이어서 어느 누구도 싫어하지 않았겠지만 그 용모가 독특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약간의 미소가 감돌았지만 그의 얼굴뿐 아니라 자세나 모든 면이 거북이를 연상케 하는 그런 모습이어서 이 분은 매우 장수할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191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여덟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그의 타고난 음악적 천부는 그가 장차 탁월한 음악가가 되리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는 경성고보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는데 연전에는 음악과가 없었지만 김영환, 현재명등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선구자들이 음악을 맡아 가르쳤기 때문에 김생려, 이인범, 정희석등 당대의 저명한 음악인들을 길러낼 수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약 했을 뿐 아니라 1936년 제15회 연전추기음악회에서 제2바이올린 주자로 출연한 일도 있었다. 그는 1937년 당시의 부민관에서 성악가(바리톤)로 독창회를 개최하였고 그 사실을 여러 번 나에게도 자랑하였다. 그 뒤에도 그는 작곡의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여 많은 가곡들을 지어 24회나 작곡 발표회를 개최하는 등 작곡가로서도 큰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그를 한양대학교 설립자 보다는 음악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연준가곡집에는 1,500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가 지은 성가들을 모아 성가곡집을 출판한 일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김연준은 음악인으로서 일생을 마칠 수는 없는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거상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재리의 밝고 사업에 타고난 능력을 가진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부친이 일제 때 이미 공옥이라는 이름의 학원을 인수하여 경영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확인해 보지는 못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기술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던 선각자로서 해방 뒤에 일제 때 소화공과이던 일본인의 학교를 인수하여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급기야 한양공과대학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한양공대를 한양대학교 발전시켰고 1973년부터 15년 동안 한양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 그 뒤에는 학교법인의 이사장으로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시무하였다. 아들 김종량이 총장으로 취임하여 한양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아버지보다도 더 영리한 그의 아들은 총장직을 적당한 시기에 물러나 재단이사회를 맡아 계속 조용히 한양대학교를 키워왔다.

 

김연준의 사람됨에 대하여 몇 마디 하고자 한다. 그는 음악인이며 교육자였지만 더 뛰어난 재능은 그의 사업 능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만일 교육사업에 한평생 종사 하지 않고 전적으로 기업에 투신했더라면 아마도 굴지의 재벌이 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던 적이 있다. 본디 서울시의 공원부지였던 땅을 불하받아 한양학원을 건설하는데 인근에 농사꾼들이 갖고 있는 농토를 팔려고 하지 않았고 사자고 하니 평당 천원도 안 하는 땅을 오천 원을 받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럴 때 사업가 김연준은 그 농부들과 승강이를 하지 않고 알았다라고 한마디 하고 나서 학교부지와 그들의 농토 사이에 담을 쌓기 시작하였다. 매일 담이 조금씩 높아지는 것을 보고 농토의 주인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마 학교에서 우리 땅을 안 살 모양이다그들은 값을 낮추고 낮추어 평당 천원이면 좋겠다고 할 때까지 김연준은 기다리고 기다려 오천 원 받겠다던 땅을 평당 천원에 매입할 수 있었고 얼마 뒤에 그 담을 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인이나 교육자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무서운 투지를 가지고 있는 사나이여서 4.19가 터지고 학원들이 모두 소란해 졌을 때 한양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간 시끄럽지 않았다. 그는 사리에 어긋난 학생들과 싸워 감금되기도 하고 팔이 부러지기도 했지만 한양을 지켜 오늘의 기초를 다진 것이었다. 그는 여러 해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서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는 200894세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는 훌륭한 바리톤이어서 지금도 그가 부르던 찬송가 소리가 내 귀가 쟁쟁하다.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 /믿는 맘 가지고 보겠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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