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63) 임원식

 

 

한나라의 역사에는 가끔 뜻밖의 일들이 벌어진다.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신흥국가를 건설하기 이르렀는데 그 시대를 이끌어 나간 인물들이 대게 비슷한 지역에 출신들이라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나는 본디 누구의 고향도 묻지 않는 사람이다.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이 나라의 고질인데 상대방의 고향을 묻고 그 다음으로 출신 학교를 알아보기 때문에 지역감정의 뿌리는 점점 깊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역사에도 그와 비슷한 일들이 가끔 벌어져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평안북도 의주라는 곳을 나는 찾아가 본 적이 없지만 그 지역에서 비슷한 시대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한 사람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던 손기정이고 또 한 사람은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휘자 임원식이다.

 

그들은 아마도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손기정은 달리는 천재였고 임원식은 음악의 천재였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1919년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매우 어린 나이에 서양음악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집에 오르간도 없고 피아노도 없어서 다니던 교회 오르간을 붙잡고 천재 소년 임원식은 서양음악에 매료되었다. 그는 나이 여섯 살 때 가족이 모두 만주땅 봉천으로 이사를 가서 그는 이미 소년시절에 피아노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경제적으로 자립 하였다. 1939년 그의 나이 20세에 하얼빈 제일음악학원을 졸업했는데 이 학교는 백계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음악 학원이었다. 거기서 작곡과 이론을 익혔고 피아노 연주에도 남다른 솜씨를 드러냈다. 만주에서 공부를 끝낸 임원식은 23세가 되던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원에 입학, 피아노를 전공하는 한편 작곡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동경에는 이미 김원복, 전봉초, 윤기선등이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임원식은 영화음악의 편곡을 맡아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학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다시 하얼빈으로 가서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관현악단에서 편곡하는 일을 맡는 한편 이때부터 지휘에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지휘법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상임지휘자가 갑자기 그 관현악단을  떠나게 되었을 때 임원식은 그를 대신하여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고 그가 서울에 돌아왔을 적에는 우리나라에서 임원식만한 음악경력을 쌓은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음악적 재능을 젊어서 또는 어려서 개발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던 임원식은 음악교육의 뜻을 품고 이화여중에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맺은 인연 때문에 그는 뒤에 서울예고를 창설하였고 우리나라의 조기 음악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음악을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여 1948년 미군정하에서 피아니스트 윤기선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캘리포니아 하기음악제에 참석하여 쇤베르크로부터 명곡 해석에 대한 지도를 받기도 하였고 텡글우드에서는 세계적인 지휘자 쿠제비스키로부터 지휘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194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교수로 취임하였다.

 

다재다능했던 임원식은 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이었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 초연 무대를 지휘하였고 오페라 운동에도 열성으로 참여하여 이미 젊은 지휘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 기도하였다. 한국 최초의 교향악단이 창단된 것은 해방 직후인 19459월이었다. 고려 교향악단 창단이 우리나라 관현악 운동을 시작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고려교향악단이 재정난 때문에 해산하게 되었고 임원식은 1956년 방송국의 지원을 받는 KBS 교향악단을 창단 그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그 운영 책임을 그가 전적으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 KBS 교향악단 음악 애호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1969년 국립으로 개편되었고 국립교향악단은 임원식을 초대 지휘자로 맞아 그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이 사실이다.

 

임원식의 사람됨에 대하여 몇 마디 하고자 한다. 그가 다재다능했던 사실은 만인이 다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는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핸섬한 사나이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누굴 만나도 언제나 경쾌한 표정이었고 생김새뿐 아니라 옷차림도 태도도 월등하게 멋있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우리가 흔히 부르는 찬송가중 몇 곡을 재즈로 편곡하여 연주하는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 그것은 연주회가 아니라 그가 즉흥적으로 몇 사람 앞에서 공연 한 것뿐이지만 듣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1953년 임원식은 이화여자대학교 음대를 떠나 서울대학교 음대로 자리를 옮겼고 그 뒤에는 서울예고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1978년 그가 많은 재능 있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경희대학 음대학장으로 취임했을 때 그 활동을 방해하는 세력만 없었다면 아마도 경희대 음대가 이 땅에 굴지 가는 음대가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측근들이 많다. 그는 대한민국과 서울시가 문화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상을 다 받았고 임원식음악상도 제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20028월에 할 일 많은 세상을 그대로 두고 그가 어려서부터 믿기 시작하였고 한평생 사모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이글을 쓰는 오늘 임원식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그리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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