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인물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56) 조순

 


조순

 

  1941,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여 미국이 일본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던 바로 그 해 봄에 나는 평양에 있는 한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만수대에 우뚝 솟은 그 학교에 같이 입학한 학생이 220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 조자룡이라는 이름의 소년처럼 의젓한 소년은 없었다.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는 것과 그의 부친이 한학자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 밖에는 그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귀공자처럼 잘생겼고 당시의 조선인이 거의 다 강요에 못이겨 창씨개명을 하던 그 잔인한 계절에 조상이 물려준 성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는 특이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해마다 학급과 담임이 바뀌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3학년에 올라가 둘러보니 조자룡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억지로 황국신민이 되어 잠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조차 모르는 일본 천황의 거처를 향해 조회 때마다 궁성요배를 해야 했고 황국신민서사를 읊조려야 했던 매우 암울한 세월이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근로봉사에만 끌려다니다가 졸업장은 겨우 받았다. 그 해에는 문과 지망생들의 대학 진학의 길이 막혀 있어 나는 평안남도의 어느 시골 국민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가 돌연 청천벽력같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도 잠시였고 남북이 38선으로 분단되고 독립의 꿈도 일단 접어야 했다. 소련군과 함께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에게 한동안 시달리다가 뜻하는 바 있어 월남하여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친구 조자룡을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길은 없었다. 나는 연희대학교에 자리를 잡고 교수가 되어 어느날 순화동에 있던 풀브라이트 하우스에서 서울 상대의 조순이라는 교수의 강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그것이 70년대 어느해 가을이었다. 조순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조자룡이 조순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 강릉 사람들을 만나면 조자룡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우신조로 연희전문을 졸업한 강릉출신 선배를 한사람 만나 비로소 조순이 조자룡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몇 십년 만에 나는 어릴 적 친구 한 사람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공부를 잘 하던 조순은 한국 경제학계의 한 학파를 이룰 만큼 대가가 된 것도 사실인데 그는 유교적 소양을 단단히 쌓아 올린 인물이라 과거에 급제한 선비처럼 벼슬을 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 한다는 일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한때 육사의 교관이 되어 생도이던 노태우를 가르친 적이 있었던 그 인연 때문에 노태우 정권에 발탁되어 1990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의 자리에 오른 일도 있고 1992년에는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1995년 그가 민주당에 입당하여 민선1기 서울특별시장에 당선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선거운동에 정운찬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대거 발 벗고 뛴 것도 사실이지만 친구인 나도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에서 실시된 그의 유세를 돕기 위해 그 곳에 가서 찬조 연설을 한 기억도 있다.

 

  서울시장 조순과 함께 프라자호텔 일식집에서 마주 앉아 창밖에 시청 건물과 그 광장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중학생 시절의 옛 추억을 새롭게 나눈 적이있다.  어렸을 때 그를 보고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나의 짐작이 적중하였다는 생각에 흐뭇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행로는 순탄치가 않았다. 김대중의 정계 복귀 후 조순은 민주당을 탈당 하였고 그로 인하여 그는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으며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정계를 은퇴한 셈이다. 왜 그에게 대통령이 되고 싶은 꿈이 없었을까만은 한국의 정치판이 그의 그런 꿈을 밟아버렸기 때문에 그 꿈은 결국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어떤 유명한 정치인이 자기 자신을 경제에는 능통하였다고 자랑하여 장차 경제대통령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던 때 내가 그에게 한마디 물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이 과연 경제를 잘아는가조순이 그 자리에서 대답했다. “경제를 알긴 뭘 알아케인즈학파의 전통을 이어 받았던 경제학 교수 조순 앞에서 경제를 안다고 큰소리치던 것은 몰상식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경기중학에서 졸업장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동창회는 별로 가는 일이 없고 평양의 그 중학교 동문회에는 참석하곤 하였다. 산에 다니는 것이 그의 취미여서 시장에 출마한 그를 산신령 같다고 한 것은 근엄하게 생긴 얼굴에 눈썹이 길뿐만 아니라 그 긴 눈썹에 흰서리가 내렸기 때문이다. 한때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땀이 자꾸 흐르는데 현대 의학이 고치지 못한다고 그가 우스게 소리처럼 말한 적도 있지만 그 병은 이럭저럭 퇴치가 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근년에는 일년에 한번 모이는 우리 동문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한학의 대가라고도 불릴 만큼 한학에 익숙할 뿐 아니라 한시도 꽤 많이 지었다고 들었다. 서예에 능하여 단아하면서도 힘있는 그의 붓글씨는 많은 사람들을 감탄케 한다. 중학생 시절에도 그의 붓글씨는 탁월하였다.

 

  만수대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속칭 평고출신의 반은 아마도 38선을 넘어 월남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해마다 가을이면 동문회가 열리고 대동강이라는 두툼한 교지를 한 권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 잡지는 미국 국회도서관에 정기적으로 납본이 허락 되어 있다. 몇 백 명이 모이던 동문회 회원들이 해마다 줄어들어 이제는 100명 정도 밖에 모이지 못한다. 40회 졸업이 최연소 인데 86세는 되었으리라. 그러나 금년 가을에도 또 모일 것이다. 월남한 동문들 중에는 국무총리를 지내 현승종, 이영덕, 노신영도 있고 노진설은 대법관을 이태희는 검찰총장을 이익흥은 법무장관을 지냈다. 김래성, 오영진은 저명한 작가였고 박종홍, 안병욱, 김흥호, 지명관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철학자들이였다. 그러나 1941년에 입학한 동기생들 중에는 단연 서울시장을 지난 조자룡이 가장 출세한 사람인데 그와 내가 같이 다니던 그 학교의 넓은 교정에 있던 스탠드에 앉아 초시류’(趙子龍)와 담소하던 그 시절이 무척 그립다. 78년 전의 옛일이건만 그날이 한없이 그립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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