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5(월)구십이자술 75(역사는 그대로 살아있다)

 

역사는 그대로 살아있다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71년 전 여름의 일이었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다니던 그 대학의 총학생회장이었다. 당시 우리가 다니던 대학을 지킨다고 간부 몇 사람은 집에 가지 않고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박상래 교수가 나를 찾아와 "인민군이 가까이 다가왔는데 군들이 잠시 학교를 떠나 있어야지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길 지 모르지 않는냐"라고 타이르면서 학교 회계로부터 돈봉투 하나를 받아 나에게 넘겨 주었다. "학생회 간부들과 잠시 학교를 떠나 있다 돌아와요" 그것이  교수님의 부탁이었다.

     우리 역사에 매우 긴급한 한때였다. 한강철교는 이미 폭파 되었고 그리하여 새벽에 한강을 건너는 일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 가까스로 작은 배 하나를 얻어타고 서강으로 하여 한강을 건너 나와 나의 동지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행진을 거듭하였다. 그렇게 떠난 여행이 쉽사리 끝나지 않고 부산의 해운대까지 가서 9.28 수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서울까지 간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는 무리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속담대로 인천까지 가야하는 경찰 경비정이 하나 있다는 걸 알고 교섭을 하였다. 그 책임자가 학생은 몇 태워줄 수 있다고 약속하였다. 그 배가 영도 앞바다를 떠난 것은 10월 초순이었다. 9.28 수복이 전면적인 수복이 아니라 인민군의 허를 찔러 서울만 수복했기 때문에 우리를 태워준 경찰 경비정은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지 못 하고 해안선에서 꽤 먼 곳으로 나아가  인천을 향해 무모한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밤중에 풍랑을 만난 우리는 만경창파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니 경비정에도 물이 차고 그 물은 퍼내고 퍼내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생겼고 승객 몇 사람은 죽을 고비에까지 갔다. 물을 아무리 퍼내어도 배는 또 물이 고이고 띠뚝거리던 그 조그만 경비정에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나의 죽음이 가까운 걸 알았다. 죽기 전에 기도라도 한마디 하자는 생각으로 나는 그 배의 조그만 갑판에 기어올라갔다. 폭우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한마디 기도를 올렸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 제게 할 일이 있으면 저를 살려주셔야죠" 그것이 기도의 전부였다. 갑판에서 내려와 계속 물을 퍼내고 고생을 하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갑판에 올라가 드린 기도는 매우 간단한 기도였지만 심각한 기도였다. 문자 그대로 비장한 한마디였다. 매우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그런 기도를 한 것이었다. 배에 쓰러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람은 불지 않았고 비도 쏟아지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다 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 세 살이었는데 오늘 나는 아흔 네 살이다. 내가 오늘까지 살아있는 것이 그때 갑판 위에 기어 올라가 드린 기도 한마디와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사명이 있어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나는 함부로 떠날 수 없는 사람이다. 남이야 어떻게 풀이하건 나 자신의 풀이가 중요한 거 아닌가. 하나님이 어떤 사명을 내게 주셨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하나님이 내게 부탁하시는 일을 다하기 위하여 나는 내 목숨을 바쳐 일을 해야 한다. 스물 세 살에 죽었어야 할 목숨이 오늘도 살아있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나를 이날까지 살려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나는 믿는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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