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4(토) -어른이 없는 세상- (3475)

 

내가 젊었을 적에는 연희대학의 백낙준 총장과 이화여대의 김활란 총장이 나에게 있어서는 큰집의 대들보처럼 느껴지는 어른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늘 든든하였습니다.

사회에 나와서 일을 시작한 뒤에는 몇 분 선배들이 어른으로 여겨져 정초에는 꼭 세배를 다녔습니다. 신교동 입구에 있는 맹아 학교 건너편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께서 조그마한 한옥에 살고 계셨는데 나의 누님과 나는 해마다 꼭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신교동 길목에 큰 가로수가 하나 서 있고 바로 그 가까이에 천우사(天友社)를 창업하신 전택보 사장이 살고 계셨습니다. 전 사장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도 꼭 사모님을 찾아뵙고 새해 인사를 드렸습니다.

신교동 언덕 기슭에는 나영균 교수의 연로하신 어머님이 살아계셔서 정초에는 나 선생의 부군 전민제 사장도 거기서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댁에서 세배가 끝나면 명륜동의 김성식 고대 교수, 김상협 고대 총장,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오재경 로터리 총재 댁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들 중에 단 한 분도 살아 계신 이가 없으니 서울 장안에는 세배를 다녀와야 할 댁이 한 곳도 없어서 처량합니다.

벌써 11월에 접어들었으니 올해도 다 끝나가는 그 때가 되었으니, 2018년의 새해도 곧 밝아올 것입니다. “어른이 없어서 적막하다”는 내 주장은 전근대적인 발상이라고 탓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선배를 다 잃은 나의 서러움은 그렇습니다. 나는 진정 그 시대의 어른이셨던 그 선배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런 어른들이 안 계신 오늘이 매우 적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마다 잘났다고 으스대며 큰소리치는 이 시대가 바람직한 시대는 아니라고 오늘도 나는 생각합니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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